신돈의 죽음과 정치적 위기[편집]
1371년 7월 신진사류의 정치적 성장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던 신돈이 역모죄로 사형을 당하는 커다란 정세 변화가 있었지만, 정몽주를 비롯한 그들은 중국대륙의 새 주인으로 떠오른 명나라와의 외교관계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14] 그는 신돈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는데, 신돈 암살 이후 신돈이 신진사류를 적극 채용한 일로 엮여져서 정치적 시련을 겪게 되었지만, 후일 그는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는 모략을 하는데 가담, 협력하는데 동참하게 된다.
외교, 정치 활동[편집]
1372년(공민왕 21년) 3월 명나라가 서촉지방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정사(正使)인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남경에서 고려로 귀국하는 길에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난파당했다. 정사인 홍사범 등은 익사하고 정몽주는 바위 섬에서 구사일생으로 표류 13일 만에 살아났다. 그 뒤 표류하였으나 그는 가슴 속에 명 태조 주원장의 서신을 간직하며 물에 한번 젖지 않게끔 보존하고 있었다. 명 태조가 이 소식을 듣고 배를 보내어 굶주림 속에서도 의연한 그의 모습을 보고 귀국을 도와주었으며, 이 사실이 알려져 명나라로부터 깊은 신뢰를 얻게 되었다. 그는 1373년 7월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때 중국의 한 객관에서 지은 시가 후대에 전한다.
몸을 돌보지 않는 노력과 자신의 외교적, 학문적 능력 덕분에 정몽주는 1375년 쫓겨났던 다른 동료들에 비하여 꾸준히 정치적 성장을 이룰수 있었다.[17] 그러나 그의 정치적 성장에 이보다 더욱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그의 달라진 정치관이었다.[17] 그해 3월 개경으로 되돌아왔다.
정몽주는 공민왕 대와 달리 우왕 대에 관직에 복귀한 이후에는 시류에 영합하면서 권력자들의 뜻에 어느 정도 맞추어 가는 쪽으로 처신하였다.[17] 그리고 권력자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데도 신경을 많이 썼다.[17] 당시 왜구의 침입과 노략이 심하여 그는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파견하여 화친을 도모하였으나 성과없이 감금되었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1377년 9월 그는 사신을 자원하여 왜에 보빙사(報聘使)로 건너갔다. 그가 직접 사신으로 파견돼 귀국 시, 수백 병의 포로들을 데리고 오는 외교력을 보여줬다. 왜(倭)에 파견되는 사신으로 일본 규슈에 가서 규슈 탄다이(지방장관)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을 만나 왜구의 약탈로 인한 피해가 심하여 일본과 외교가 어려운 점을 지적하여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여 응낙을 얻고, 국교의 이해관계를 잘 설명하여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이때 학문적 소양이 있던 왜의 규슈탄다이 이마가와 료슌과의 대화에서 두 나라 사이에 교류하는 의리와 이해관계를 설명하였는데, 이마가와는 그의 뛰어난 인품과 학식에 탄복하였다 한다.
규슈 성주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언행에 감복해 특별히 우대했다. 일본 승려들이 모여들어 시를 청했고 매일같이 가마를 타고 규슈 내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였다. 1378년 7월 포로나 노예로 끌려갔던 수천 명을 배에 싣고 일본에서 돌아왔다. 고려인 포로 수천명을 구해 되돌아온 일로 명망을 얻었다. 이후 우산기상시·보문각 제학·지제교를 거쳐 1379년(우왕 5년) 우산기상시를 거쳐 전공판서(典工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의 판서(禮儀判書)·예문관 제학·전법판서(戰法判書)·판도판서 등을 역임했다.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문관으로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 토벌에 참가하였다.
1380년 9월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가던 중 조상의 고향인 전주에 들른다. 이곳 오목대에서 종친들을 불러 환영잔치를 베풀면서, 자신이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속내를 내비친다. 당시 종사관이 되어 황산대첩에 참가했던 정몽주는 이 말을 듣고 노여움을 참지 못해 잔치자리를 빠져나와 말을 달려 남고산성의 만경대에 올라 한탄하는 시를 짓는다. 그 뒤 밀직제학(密直提學)·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보문각 제학·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1381년(우왕 7년) 초 첨서밀직사로 승진했다.
1381년(우왕 7년)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봉해지고 이듬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선발되어 진공사(進貢使)로 명나라에 가다가 여진족을 만났으나 어렵게 야인들의 화를 피하여 중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측의 오만한 태도와 입국 거부로 요동(遼東)에서 되돌아왔고, 그해 청시사(請諡使)로 다시 명나라에 갔으나 역시 입국을 거부당하여 요동에서 다시 되돌아왔다.
1383년(우왕 9년) 3월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거쳐 동년 가을 동북면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함경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토벌하고,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그 시 명은 우왕의 요동 정벌 계획을 사전에 입수하여 고려에 출병하려고 병력을 증원하였으며, 고려에 최후통첩을 보내 매년 보내는 토산물을 증액시켰으며 5년간에 걸쳐 토산물을 약속대로 보내지 않았다고 하여 사신 홍상재(洪尙載) 등을 유배보냈다. 정몽주는 토산물의 부족과 명나라 태조의 처사가 지나침을 호소하였고, 스스로 사신의 직책을 자청한다.
그해 주원장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聖節使)가 파견될 때, 사신을 보내 명 태조의 생일을 축하해야 하는 형편이었는데 사람마다 가기를 꺼려했는데, 사신 중 일부는 명 태조가 그자리에서 처형했기 때문이었다. 정몽주는 자원하여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세공(歲貢)의 감축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을 면제받고 긴장 상태에 있던 대명(對明) 국교를 회복하게 하였다. 또한 이전에 억류된 홍상재 등도 풀려나 돌아오게 했다. 1385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여 우홍명(禹洪命) 등 33인을 선발하였고, 1386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다시 동지공거가 되었다.
1386년에는 명나라에 바쳐야 할 5년간의 공물과 일방적으로 명나라에서 늘려 정한 공물을 면제하여 줄 것을 청하러 간 것이었는데[17], 명의 황제로부터 (공물 면제) 승낙을 받고 돌아옴으로써 집정자들의 큰 부담을 덜어 주기도 하였다.[17] 또한 고려의 흉년과 입을 옷감이 부족한 점을 들어 구원을 요청하여 명나라로부터 갓과 의복, 옷감 재료의 지원을 받아오는데 성공하였고, 동시에 명나라로 보내는 토산물의 액수를 감해줄 것을 요청하여 밀린 5년분과 증가한 정액을 모두 면제받았다. 우왕은 그의 공적을 치하하여 옷·안장 등을 하사하였고, 그는 바로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었다.
1387년 다시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지고, 1387년 명나라가 철령위를 원나라때부터 다스렸던 땅임을 들어 철령위를 요구하였다.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에 전쟁을 주장하는 최영 등 강경파와 외교로 해결하자는 이성계, 정도전 파로 나뉘게 되자 그는 외교론자가 되어 이성계와 정도전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그해 6월 그는 하륜(河崙)·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건의하여 백관(百官)의 관복을 정하여 호복(胡服)을 폐지하고 중국제도를 따랐다. 이때 명나라 사신 서질(徐質)이 와서 보고 감탄하여, “고려가 다시 중국의 관대를 따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또한 불교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정도전과 함께 불교비판의 선봉장에 서고, 유학을 권장하였으며 성균관을 통해 성리학 사상의 확산에 노력했다. 이후 최영을 비판하여 실각시키고 정계에서 축출하는데 성공한다. 그해 12월에 경사(京師)에 가서 조빙(朝聘)을 통하기를 청하였다.
위화도 회군 찬성[편집]
1388년 5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자 이를 적극 도와주었다. 정몽주는 위화도 회군을 찬성했다.[18] 1388년 최영과 우왕이 계획한 요동 정벌이 이성계가 주도한 위화도 회군으로 무산되고, 우왕이 폐위당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창왕(昌王)이 왕위에 올랐다. 국가 운영은 이성계가 주도했고, 정몽주는 더욱 출세 가도를 달렸다.[19]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와 결합한 신진사류 대부분이 정치 일선에서 활발한 활약을 보였지만 정몽주는 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다. 고려사 정몽주전에는 이성계가 매번 출전할 때 정몽주와 함께 나갔고, 여러 번 천거하여 함께 재상이 되었다고 기록할만큼 이성계와 정몽주는 가까운 사이였다.[19]
정몽주는 이성계가 이름을 빛낸 1380년 전라도 남원군 운봉[19](지금의 남원 지역)에서의 왜구와의 전투에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참여하기도 하였다.[20]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는 데 동의했던 정몽주는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이에 반대했다.[21]
타살[편집]
1392년 4월 26일(공양왕 4년 음력 4월 4일) 새벽 그는 악몽을 꾸었는데,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음을 예상하였다. 그날 아침, 조상들의 제단 앞에 절하고 부인과 두 아들을 불러놓고 '충효를 숭상하는 우리 집의 가문이니 조금도 낙심 말라'는 유언과 새 조정에서 주는 벼슬을 거절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4월 26일(음력 4월 4일) 저녁 정몽주는 낙마로 부상당했다는 이성계의 문병 겸 동태를 살피기위해 이성계의 집을 방문, 정황을 살피고 귀가하던 중,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와 그 일파에게 암살당했다. 일부 전설에 의하면 그가 이성계 집을 방문한 것은 이방원이 계략을 써서 그를 초청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때 이미 이방원은 심복부하 조영규를 시켜 쇠뭉치를 꺼내어 선죽교 다리 밑에 숨었다가 정몽주가 지나갈 때 쳐서 죽여버려라 하고 지시하였고, 정몽주는 변중량을 통해 이 정보를 입수했었다.
조영규와 무사들이 나타나자 그는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하여 말을 타고 이성계의 자택을 떠났으나, 돌아오면서 친구 집에 들려 술을 마신 후 말을 거꾸로 타고 마부에게 끌라했다. 말을 끄는 사람이 정몽주 선생이 술이 취해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아한 눈치로 물으니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한이 앞에서 흉기로 때리는 것이 끔직하여 말을 돌려 탄 것이다
하고 답하였다.
그 말을 이해 못한 마부는 말을 끌고 선죽교(善竹橋)를 향했다. 선죽교를 넘으려 할 때 궁사가 말 혹은 정몽주를 저격하여 넘어트렸고, 마부가 쓰러지자 순간 조영규가 이끄는 고여(高呂[23]), 조평(趙評) 등 5~10여 명의 괴한이 나타났다. 정몽주는 이들이 비열하게 숨어서 사람을 공격함을 질책하고 말을 달렸으나, 부상당한 채 도망치는 정몽주를 쫓아가 철퇴 또는 몽둥이와 철편으로 때려 죽였다.
이때 그가 조영규, 고여, 조평 등의 철퇴에 맞고 흘린 피가 개성 선죽교의 교각에 일부 묻었는데, 후일 백범일지에 의하면 1945년이후 김구(金九)가 선죽교를 방문할 때까지도 그 흔적이 있었다 한다. 이후 선죽교 돌 틈에서는 대나무가 솟아 그의 충절을 나타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후 이 다리는 원래 선지교라고 하였으나 다시 선죽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송도에 내려오는 한 전설에 의하면 정몽주가 선죽교 근처에서 사망하지 않고, 피습을 당한 뒤 개경부 태묘동까지 부상당한 상태로 피를 흘리며 피신해왔으나, 그의 뒤를 따라온 이방원의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전승도 전한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6세였다.
타살 직후[편집]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자손들에게 자신의 묘비를 세울때는 반드시 고려의 관직을 적으라고 유언을 남겼다. 1392년 4월 정몽주는 역적으로 단죄되고, 수급과 시신은 바로 이방원의 수하들에 의해 베어져 개경의 저잣거리에 매달려졌다. 그의 시신은 역적으로 몰려 방치되다가 우현보(禹玄寶)와 송악산(松嶽山)의 중들에 의해 수습되어 승려들이 염습한 뒤 개경 풍덕(豊德)에 가매장되었다가 후일 경기도 용인 능원리로 이장되었다.
그의 죽음을 놓고 이성계가 이방원을 비토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에 의하면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에게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가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이렇게 불효한 짓을 감히 하니 내가 사약을 먹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라며 책망하였다고 한다.
“ | 우국시(憂國詩)
千仞崗頭石逕橫 (천인강두석경횡) / 천길 바위머리 돌길로 돌고 돌아
登臨使我不勝情 (등림사아불승정) / 홀로 다다르니 가슴 메는 근심이여 靑山隱約夫餘國 (청산은약부여국) /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서하던 부여국은 黃葉檳紛百濟城 (황엽빈분백제성) / 누른 잎은 어지러이 백제성에 쌓였도다 九月高風愁客子 (구월고풍수객자) / 구월의 소슬바람에 나그네의 시름이 짙은데 百年豪氣誤書生 (백년오기오서생) / 백년기상 호탕함이 서생을 그르쳤네 天涯日沒浮雲合 (천애일몰부운합) / 하늘가 해는 지고 뜬 구름 덧없이 뒤섞이는데 矯首無由望玉京 (교수무유망옥경) / 다리를 지나며 고개를 들어 하염없이 송도만 바라보네 | ” |
“ | 춘흥(春興) : 봄의 흥취
春雨細不滴 (춘우세부적) / 봄비 가늘어 방울지지 않더니
夜中微有聲 (야중미유성) / 밤 깊어 희미하게 빗소리 들려라 雪盡南溪漲 (설진남계창) / 눈 다 녹아 남쪽 개울에 물 불어날 것이니 多少草芽生 (다소초아생) / 풀싹은 얼마나 돋았을까 | ” |
奉天門前 謁天子 金陵市上醉佳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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