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 - 미완성 종교학 개론서
1. 작품 설명
반기독교 사상을 가진 신학도 주인공 민요섭은 하여금 예수와 동시대에 살았다고 하는 허구의 인물 아하스 페르츠을 만들어 종교사상의 정리와 일종의 신흥종교의 창조를 시도한다. 이 작품은 작품 속의 인물이 다시 작품을 저술하는 피카레스크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민요섭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자신의 분신인 아하스 페르츠를 통하여 기독교의 모태인 유대교와 중동, 인도, 로마, 그리스까지 돌며 세상의 대부분의 종교를 접하고 실망한다. 마지막은 예수와의 논쟁을 통하여 자기만의 종교철학을 제시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막시즘과 이성주의 무신론 철학과 닮은 것이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반전이 일어나는데 주인공 민요섭을 살해한 이는 제자 조동팔이었고 민요섭의 사상에 심취했던 이도 조동팔이었다. 오히려 민요섭은 기독교의 신으로 돌아가고자 했었고 조동팔만이 굳건히 자신들의 철학의 집대성인 ‘사람들의 신’을 지킨 것이었다. 즉 예수라는 ‘신의 아들’과 대립되는 개념인 ‘사람의 아들’은 실존인물이 아닌 허구의 인물 아하스 페르츠였으나 민요섭이 현세에서 이를 대행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그 ‘사람의 아들’은 사실 조동팔이었다.
2. 작품의 읽을 거리
1) 세계종교에 대한 작가의 정리
앞서 설명한 대로 본 작품은 대부분의 종교에 대한 정리를 담고 있다. 다양한 종교의 신의 이름만 200개 이상 등장한다. 이 책을 보는 것만으로 중동종교에 대한 개략적인 정리가 가능할 정도이다. 유대교, 이집트와 중동 고대종교, 조로아스터교, 예수의 출현에 따른 초기 기독교 출현부분은 매우 잘 정리되어 있다.
2) 풍부한 기독교 역사에 대한 자료와 논의들
엄청난 분량의 종교들 특히 기독교 교리와 성경외의 기독교 역사까지 한 권의 소설로 묶어낸 작가의 역량은 놀랍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를 포함한 여러 종교에 관한 지식이 부족한 독자가 이 작품을 읽고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특히 기독교사 부분에 대한 작품의 내용은 단순히 허구가 아니라 종교학적으로 연구가 진행된 부분들인데 이 작품을 읽고 간략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잘 구성되어 있다. 가령 야훼가 엘 사타이의 목양신으로 출발했는데 모세를 통하여 호렙의 군신 개념이 추가되고 엘리야서에서 아랍의 신 바알의 농신 개념을 흡수한 후 조로아스터교를 통하여 신과 대립하는 사탄, 천국과 지옥, 심판, 구세주 개념을 받아들여 완성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므로 독선에 빠진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꼭 읽어야 할 대목이다.
3) 작품의 진정한 백미 - 신의 아들 vs 사람의 아들
이 작품 최대의 읽을거리는 예수와 대적하는 사탄의 재해석이다. 성경과 예수는 자신의 논리에 대항하여 토론을 벌인 이름 모를 어떤 이들, 작품에서는 아하스 페르츠를 흉성의 기운을 받아 출생한 사탄의 자식으로 매도하지만 그는 사실은 전 인류를 진실로 대변한 ‘사람의 아들’이었다. 사실 이러한 개념은 작가가 처음 사용한 고유한 개념은 아니다. 이미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에게 반대하여 인간에게 불을 갖다 준 프로메테우스로부터 악마와 귀신들을 불쌍히 여겨 지옥에 떨어진 불교의 공작왕, 가깝게는 천제 환인을 떠나 인간사회로 내려온 환웅신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작품에서 아하스 페르츠는 사람들에게는 물질적 풍요도 중요하며 성경이 언급한 기적들에 대한 의구심을 표출하고 압제자에 맞서 물리적인 저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놀랍게도 성경은 이 논쟁에 대하여 사탄이 예수를 유혹하기 위하여 떡을 권하고 신을 시험하고 세상의 권세 제안했다고 너무나 가볍고 단순하게 폄하한다. 사람의 아들과 예수의 대립구도는 후반부까지 계속되어 예수를 비판하는 대목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기독교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종교가 가진 논리적 오류가 폭로된다. 그러나 이 작품을 종교논쟁 정도로 이해한다면 다른 중대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고 왜곡될 수 있으며 모든 대립하는 행위 주체들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사물의 이면과 다양한 관점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는 것을 이 작품은 종교를 소재로 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3. 작품의 아쉬운 점
가장 눈에 띄는 문제는 작가가 왜 피카레스크 형식을 왜 굳이 썼느냐 하는 점이다. 민요섭과 조동팔이 굳이 등장해서 작품이 오히려 어지럽다. 작가는 아하스 페르츠 단독으로 작품을 낼 수는 없었을까? 아마도 작가 스스로 기독교부터 다른 세계종교를 언급함에 있어서 무리한 시도를 하였고 스스로 정리하지 못했기에 그 작품을 마치 작중 인물 민요섭이 쓰다 만 것처럼 책임전가를 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작가의 무리한 열거이다. 사람의 아들이 인도로 향하면서 동방종교와 철학에 대하여 깊이 있는 이해는 고사하고 피상적인 이해마저 결여하고 있는 부분들이 자주 눈에 띄는데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해탈과 열반의 종교이며 윤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교과서적 한 줄 이해 수준에 머물러있다. 오히려 후반부에 민요섭과 조동팔이 신흥종교로 제시한 ‘간섭하지 않고 자유를 주는 신’의 개념이 불교적 세계관과 유사하다는 점은 인도쪽 종교에 대한 저자의 공부가 부족하다고 지적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작가는 젼혀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도 무리한 열거와 설명을 시도한 것이다. 작가 역시 작품이 끝나고 2판 후기에서 작품의 미완성도를 일정부분 시인하고 내용을 덧붙였는데 나는 작가에게 두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첫째, 기독교의 논리적 허점을 일정부분 보완하고 있는 이슬람교와 다른 종교들까지 언급하여 제대로 된 아하스 페르츠의 세계 종교 기행을 담아 장편 소설로 리메이크하는 것이다. 에덴동산의 선악과가 사실은 지혜의 열매였다는 교리는 이미 이슬람교에 등장하고 있고 지상의 삶을 중시하는 부분은 근본불교나 중국선종, 중국철학의 가르침과 닿아 있다. 그렇다면 민요섭과 조동팔의 새로운 신, 사람을 위한 신은 이슬람과 불교의 합작품이란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 작가는 해명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이 작품은 쓰다만 미완성에 불과한 것이니까. 작가는 인도, 중국 종교 및 기독교 역사에 새롭게 연구가 진행된 유다서와 도마서까지 공부해서 더 멋진 작품으로 2탄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
둘째 제안은 유대교와 기독교, 조로아스터교를 제외한 중동 이외 지역과 예수이후 시대 종교를 전부 무시하고 신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로 대립구도만을 부각시킨 단편작품으로 리메이크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줄거리구조는 이미 마틴스콜시지 감독의 영화 ‘예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Jesus Christ, the last temptation)에서 먼저 등장했지만 예수에 대하여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사람의 아들을 등장시킨 것은 이 작품이 최초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 부분만으로도 문학적 창조성이 높다고 본다. 정리하건데 읽을거리, 생각할 거리를 엄청나게 던져준 작품이지만 미완성 글들을 모아 짜깁기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Cap. Jang's Korean C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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