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September 19, 2015

[Cap.Jang History] 81.Koryeo and Mongolia (고려와 몽골-원나라의 관계)


일본 정벌의 의미가 원나라의 경우에는 세계제국건설의 일환으로 단순히 정벌에 실패한 것에 불과했지만, 고려는 원나라의 압력으로 참전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즉, 그 동안의 대몽항전(對蒙抗戰)으로 사회적으로 피폐가 극심한데다가 일본 정벌에 소요된 함선·군량을 모두 부담함으로써 경제적 피폐를 더하게 되었다. 또 많은 인원이 함선제조에 동원되고, 정벌군·소공·수부 등으로 징발됨으로써 사회적 피폐를 가중하게 하였다.

즉, 1283년(충렬왕 9)에 제3차 정벌을 준비함에 있어 제왕(諸王)·재추(宰樞)·승지(承旨)에게는 쌀 20석(石), 치사재추(致仕宰樞)·현관(顯官: 實職官吏) 3품은 15석, 치사(致仕) 3품과 현관문무(顯官文武) 4·5품은 10석, 문무 6품과 시위호군(侍衛護軍)은 8석, 문무 7·8품과 참상해관(參上解官)은 6석, 동반(東班) 9품·참외부사교위(參外副使校尉)·남반(南班) 9품은 4석을 내게 하였다.

그리고 정잡권무대정(正雜權務隊正)은 3석, 동서산직(東西散職)·업중승(業中僧)은 1석, 백정(白丁)·초노(抄奴)·소유(所由)·정리(丁吏)·제사하전(諸司下典)·독녀(獨女)·관사노비(官寺奴婢)는 10두(斗), 상인(商人)으로 대호(大戶)는 7석, 중호(中戶)는 5석, 소호(小戶)는 3석을 내게 하여 군량에 충당하게 하였다.

이것을 보면 문무양반은 물론 노비·독신녀에게까지 쌀 10두라는 과중한 부담을 주었으니 그 당시의 경제적 고통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러한 부담은 비단 1283년뿐만 아니라 제1·2차 일본 정벌 때에도 부담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본원정 [日本遠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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